2026년 2월, 실리콘밸리에서 작은 논쟁이 벌어졌다. OpenAI의 사장 그렉 브록만이 X에 한 줄을 올렸다.

Taste is a new core skill.

취향이 새로운 핵심 역량이라고. 같은 시기, Y Combinator의 폴 그레이엄도 거들었다.

When anyone can make anything, the big differentiator is what you choose to make.

누구나 무엇이든 만들 수 있게 되면, 진짜 차별화는 무엇을 만들지 선택하는 것이라고.

지난 30년간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출시하라(Build fast, ship fast)"를 외치던 실리콘밸리가 갑자기 '취향'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도구가 희소할 때와 풍요로울 때

소프트웨어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반복된다. 도구가 희소할 때는 기술이 가치를 가졌고, 도구가 풍요로울 때는 판단이 가치를 가졌다.

1995년, 스티브 잡스가 PBS 인터뷰에서 "Microsoft의 유일한 문제는 취향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던 때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2002년, 폴 그레이엄이 'Taste for Makers'라는 에세이에서 "훌륭한 결과물 = 까다로운 취향 +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실행력"이라고 썼던 때는 인터넷이 소프트웨어 개발의 진입 장벽을 막 낮추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2026년. AI가 코드 작성, 디자인, 카피라이팅, 데이터 분석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 개발의 거의 모든 실행을 범용적으로 만들고 있는 지금, 이 패턴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코드를 시간당 500줄 생산하는 엔지니어보다, 어떤 5줄이 존재해야 하는지 30분 고민하는 사람이 더 가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취향의 두 얼굴: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이 논쟁에서 가장 도발적인 반론은 '당신의 취향이 AI보다 낫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AI는 이미 평균적 취향의 영역에서는 인간을 넘어서고 있다. "이 UI를 Airbnb 스타일로 깔끔하게 만들어줘", "이 광고 카피를 더 간결하게 다듬어줘" — 이런 지시는 레퍼런스가 존재하고, 기준을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AI는 이미 여기서 빠르고 정확하다.

문제는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판단의 영역이다.

'이건 지금이 아니다'의 감각. 2025년에 AI 에이전트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것과 2021년에 시작하는 것의 차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과 시장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사이의 간극을 읽는 능력. 이건 데이터로 증명할 수 없다.

'이 기능은 빼야 한다'의 감각. AI에게 "이 기능의 사용률이 낮으니 빼자"라고 지시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사용률이 높은데도 "이건 우리 제품의 방향이 아니다"라고 빼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판단이다.

'이 사람이다'의 감각. 초기 스타트업에서 파운딩 엔지니어를 고르는 판단.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는 AI가 스크리닝 가능하지만, '이 사람이 우리 팀의 빈 조각을 채운다'는 감각은 AI에게 프롬프트로 전달할 수 없다.

AI는 근본적으로 패턴 매칭 머신이다. 기존 패턴을 빠르게 조합하고 최적화한다. 하지만 프롬프트로 구현할 수 없는 취향의 핵심은 '기존 패턴 자체가 틀렸다'고 선언하는 것, 즉 역발상에 대한 베팅이다. 트레이닝 데이터의 컨센서스를 벗어나는 판단은 AI의 구조적 한계 밖에 있다.


취향을 해부하면

그렇다고 취향이 신비로운 어떤 것은 아니다. 폴 그레이엄은 취향이 주관적 감상이 아니라, 디자인을 계속 할수록 성장하는 객관적 능력이며, 분야를 막론하고 공통된 원칙들로 분해할 수 있다고 했다.

창업자의 취향은 세 영역으로 나뉜다.

큐레이션의 취향: 빼는 능력이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 아는 것. 스티브 잡스는 "집중이란 'No'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10개의 기능 중 1개만 남기는 판단, 높은 사용률의 기능이라도 제품의 방향과 맞지 않으면 빼는 판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작의 취향: 만드는 능력이다. 남긴 것을 어떤 수준으로 마감하는가. Apple의 전 디자인 총괄 조니 아이브는 이를 '끈질긴 정성(Sustained care)'이라고 표현했다. 피상적 심미성이 아니라, 모든 결정에 의도(Intentionality)를 넣는 것. 디테일의 퀄리티에 대한 감각이다.

비전의 취향: 보는 능력이다. 남들이 아직 못 보는 것을 먼저 감지하는 것. 피터 틸이 'Zero to One'에서 말한 '구체적 낙관주의(Definite Optimism)', 즉 미래에 대한 구체적 확신을 갖는 능력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취향을 작동시키는 엔진이 있다.

일원칙 사고(First Principles Thinking): 기존 패턴을 해체하고 본질을 보는 능력. 일론 머스크가 로켓의 원가를 원재료 단위로 다시 계산한 것, 정주영이 퇴역 유조선으로 방조제를 쌓은 것 모두 일원칙 사고의 산물이다.

메타 인지(Meta-Cognition): 자기 판단의 한계를 알고, 시장의 피드백으로 반영하는 능력. 폴 그레이엄이 "취향은 기를 수 있다(Taste can be cultivated)"고 했을 때, 그 배양의 메커니즘이 바로 메타 인지다. 과거의 내 판단을 돌아보고 '그때는 왜 저걸 좋다고 생각했지?'라고 묻는 능력이 취향을 정제한다.

장기적 사고(Long-term Thinking): 아직 데이터로 증명되지 않은 확신을 2~3년 견디는 능력. 제프 베조스가 "서점이 왜 서버를 파느냐"는 주주들의 질문을 견디며 AWS를 만들었듯이, 장기적 사고가 없으면 취향은 창업자의 변덕이 된다.

세 엔진 중 하나라도 빠지면 취향은 불완전해진다. 일원칙 사고가 없는 취향은 유행 따라가기가 된다. 메타 인지가 없는 취향은 독선이 된다. 장기적 사고가 없는 취향은 변덕이 된다.


한국 스타트업에 이 이야기가 특히 불편한 이유

한국은 전통적으로 실행 속도가 경쟁력인 시장이었다. '빨리빨리' 문화가 스타트업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남보다 빨리 만들고 빨리 런칭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한국 SaaS 시장의 성장도 글로벌 레퍼런스를 빠르게 현지화하는 모델에서 상당 부분 이루어졌다.

그런데 AI가 실행 속도를 평준화시키고 있다. 코드 작성, 디자인, 마케팅 카피 등 과거에 수주가 걸렸던 작업은 이제 클릭 몇 번이면 수시간만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빨리 만드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게 되면, 한국 스타트업의 전통적 강점이 사라진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 창업자에게 취향이 없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생태계가 취향을 키우고 보상하는 구조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 VC 시장은 지표(Traction) 중심의 평가를 해왔다. MAU, GMV, 매출 성장률. 이것들은 모두 프롬프트로 만들 수 있는 지표다. 측정 가능하고, 비교 가능하고, 벤치마크가 존재한다. 하지만 창업자의 취향을 평가하는 체계적 방법론은 부족했다. AI 시대에 이 구조적 한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취향은 어떻게 알아보는가

투자자 관점에서 매쉬업벤처스의 박은우 파트너가 제시한 프록시들은 흥미롭다.

"왜 이 문제인가"를 자기만의 언어로 말하는지. 다른 사람의 프레임워크를 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서 나온 고유한 관점으로 문제를 정의하는 창업자.

"경쟁사 대비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 기능 리스트가 아닌 관점의 차이로 답하는지. "우리는 이 기능이 더 있습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봅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창업자.

제품 데모에서 "이건 일부러 안 넣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기능이 적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창업자.

결국 취향은 선택의 일관성에서 드러난다.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빼고, 왜 그 방향인지 — 이 선택들이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을 보여줄 때, 그것이 취향이다.


나는 지금 취향을 키우고 있는가

"Taste can be cultivated." 폴 그레이엄의 이 말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분해하고 훈련할 수 있는 구체적 역량이다. 좋은 것을 많이 보고, 왜 좋은지 분석하고, 내 판단을 시장에서 검증하고, 틀렸을 때 왜 틀렸는지 되묻는 과정을 반복하면 취향은 성장한다.

AI가 실행의 비용을 제로에 가깝게 만들수록, 무엇을 실행할지 결정하는 판단의 가치는 반비례로 커진다. 그리고 그 판단의 질이 바로 취향이다.

지금 나는 무엇을 만들지 30분 고민하는 데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가. 취향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 이 질문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해지고 있다.